"희망을 잃지 마세요. 사람은 누구나 잘할 수 있는 일이 꼭 있습니다."

지난주 작지만 의미있는 전시회가 한 건 열렸다. 수원시 가족여성회관 내 전시실에서 열린 '흙 그리고 나'展에는 수원지역 자활센터에서 운영중인 '흙지기 도예공방' 회원 9명이 만든 생활자기 작품들이 전시됐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전시회였지만 도예 공방의 리더인 신경우(46)씨의 강력한 의지가 없었다면 전시회 자체가 불가능했을 만큼 많은 사연이 담긴 전시였다.




10년전 신씨 가족은 가장의 사업 실패로 갑작스레 빚더미에 앉게 됐다. 신씨의 남편은 빚쟁이들의 성화에 시달려 가출까지 하게 됐고, 신씨와 어린 딸은 라면으로 매 끼니를 이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이후 그는 하루에도 아르바이트 3~4개씩을 해가며 억척스러운 생활을 했다. 목욕탕 청소, 식당 설겆이, 가사도우미 등 안 해 본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했지만 늘어나는 이자와 생활비를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몸이 너무 고되고 힘들어서 자살을 결심했었어요. 18층 높이의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서 뛰어내리려고 바닥을 한참동안 쳐다봤죠. 그런데 문득 친정어머니가 걱정하시는 게 눈에 선하게 보이는 거예요. '얘야, 그것밖에 안 되니?' 하시며 질책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그때 죽을 용기로 다시 한 번 살아보자고 결심했어요."

신씨는 곧바로 동사무소를 찾았다. 그곳 직원들에게 무작정 살려달라고 했다. 신씨의 딱한 사정을 들은 한 직원은 수원에 자활센터가 있는데 그곳에서 일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 당시 자활센터에는 청소·방역, 간병사업, 도예 사업 등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신씨는 도예 부문을 선택했다.

"원래 학창시절에 미술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도자기 만드는 법을 배우면 월급도 준다는 말에 너무 기뻤죠. 이런 일석이조의 기회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저에게는 적성에 딱 맞았어요." 


 한 달에 70만원의 월급을 받으며 신씨는 열심히 화분, 화병, 찻잔 등 생활자기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월급의 대부분을 저축하며 삶의 대한 의지를 다졌다. 작업을 하다 보니 어느새 다른 이들보다 실력이 월등함을 느끼게 됐고, 도예공방의 리더까지 됐다. 이번 전시는 이런 삶의 고난을 넘어선 신씨의 제안으로 마련된 첫 번째 전시였던 것이다.

"딸과 함께 희망을 잃지 않고 한푼두푼 저축하다 보니 이제 빚이 몇 천만원밖에 남지 않았어요. 이 소식을 듣고 남편도 쑥스럽지만 집으로 돌아오게 됐죠. 지금은 가족이 다시 뭉쳐 열심히 살아가고 있답니다. 바람이 있다면 저랑 같이 일하고 있는 자활회원들의 모든 소망이 이뤄졌으면 좋겠어요. 그들도 모두 각자의 꿈이 있거든요."
/김선회기자ks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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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노철화백이 수원화성박물관을 방문, 자신이 20여 년 전에 그린 '화성전도'를 살펴보고 있다.

"아! 이 그림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지난 13일 수원화성박물관 특별 기획전으로 마련된 '그림, 화성을 품다'展에서 한 노화백이 대형 그림앞에 서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금세 그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華城(水原城)全圖'라고 이름 붙여진 이 그림은 이번 전시의 메인 작품. 10폭짜리 병풍에 그려진 이 대작은 200여년전 화성의 모습을 복원한 것으로 그림을 바라보며 탄식하던 이는 바로 이 그림을 그린 주인공인 기노철(74) 화백.

그림 왼쪽에는 그림을 완성한 시기인 辛未(1991년) 孟夏(초여름)라고 적혀있고 바로 옆에 화백의 낙관이 선명하게 들어있어 그림을 그린 이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기구한 사연이 있다.

"이 그림은 한 사업가에게 부탁받아 그린거예요. 화성에 대한 그림을 그려달라고 해 화성 일대를 돌며 몇달을 취재했죠. 난 화성이 원래 축조됐을때 당시 모습을 그리고 싶었기에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고증을 받았어요. 제가 예전 투시도를 배워 나름대로 건축물을 잘 그렸죠. 이 그림은 산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것처럼 화성을 생생하게 묘사한 겁니다."

기노철 화백은 화성 주변에 살았던 노인들의 구술과 답사를 통한 거리측정, 그리고 상상력을 더해 예전 화성 모습을 완벽하게 복원했다. 그림속 남공심돈(팔달문 옆에 있다가 현재는 사라짐), 성곽안의 초가집들과 성곽 밖의 평야, 비석이 많이 있던 마을 등은 최근 발견된 사진과 자료 등을 통해 그 실체가 충분히 입증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공들여 그린 그림을 구입한 사업가는 기업 홍보를 위해 그림을 실컷 전시한 후 작품 대금 지불을 차일피일 미루다 그만 중국으로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다.

"지금이야 이렇게 얘기할 수 있지만 그때는 너무 화가 나 죽고싶은 심정이었어요. 가족들한테도 말도 못하고. 몇달을 혼자 속앓이하다 결국은 그냥 잊어버리기로 했죠. 그렇게 20년이 흘렀는데, 어느날 수원화성박물관에 내 그림이 걸린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왔죠."

이 그림은 몇 사람의 손을 거쳐 몇 해 전 경기대학교 박물관에서 구입, 보관해오고 있다. 이번 전시는 경기대 박물관의 소장품과 수원지역 작가 15명이 참여해 수원 화성의 모습을 담은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제라도 그림을 다시 보게 돼 다행이에요. 앞으로도 박물관에서 그림 보관을 잘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화성의 원래 모습에 대해 알았으면 합니다." 대작을 남긴 화백은 이 말을 남기고 쓸쓸히 전시장을 나섰다. / 김선회기자 ksh@kyeonig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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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원복 영통도서관장이 조선시대에 한지로 제작된 갈피표를 소개하고 있다.
        갈피표의 주인으로 보이는 '김생원'이라고 쓰여있다.



"책갈피가 아니고 갈피표라고 불러 주세요."

갈피표라는 단어가 매우 생소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책갈피'란 단어가 더 익숙할 것이다. 수원영통도서관의 박원복(53) 관장은 본인이 수집한 갈피표 1천800여점을 가지고 오는 23일부터 26일까지 라마다프라자 수원호텔에서 열리는 '제19회 국제안전도시학회' 행사 기간동안 '북마크 전시회'를 선보일 계획이다.

"책갈피는 원래 '책장과 책장 사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책을 읽던 곳이나 필요한 곳을 찾기 쉽도록 책갈피에 끼워 두는 종이 쪽지나 끈은 '갈피표(書標·bookmark)'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박 관장이 도서관 캐비닛에서 꺼내 보여준 갈피표들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구한 것들로 종이에서부터 가죽, 쇠, 천, 나무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든 것들이었다. 이중에는 실크와 금붙이로 제작된 고가의 갈피표도 있었다. 이쯤되면 갈피표가 단순히 책을 보던 곳을 표시하는 물건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 박원복 영통도서관장이 모은 세계 각국의 갈피표로 왼쪽부터 태국, 일본, 캐나다, 미국에서 제작한 것.


박 관장은 부친의 뜻 때문에 갈피표를 모으기 시작했다고 한다. "저희 아버지도 도서관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셨어요. 그런데 도서관이 전산화되기 시작하면서 보관가치가 많은 소모품들이 무분별하게 버려지기 시작하는거예요. 그때 아버지께서 저에게 '네가 도서관에서 버려지는 것들을 한번 모아봐라'라고 말씀하셨죠."

그래서 그는 1993년부터 도서관에서 버려지는 회원증, 열람증, 도서목록함, 비품함, 타자기, 잡지 등을 하나 둘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자 금세 집안이 도서관 비품들로 가득 찼다.

"잡동사니들이 많아지니까 아내가 심하게 불만을 표시하더라구요. 살 공간도 좁은데 수집만하면 어떡하냐구요. 또 이사도 자주 다녔는데 그때마다 수집한 물건들이 짐이 돼서 결국 제가 모았던 비품들을 다른 분들에게 기증하게 됐습니다."

잡지 창간호 800여점을 비롯해 도서관 비품들을 다른 이에게 무상으로 주었지만 수집을 오래하던 그의 마음 한구석은 허전했다. 결국 수집을 하되 부피가 적게 나가는 것을 수집하자는 생각으로 찾아낸 것이 바로 갈피표였던 것이다. 박 관장은 주위에서 그냥 굴러다니는 갈피표를 하나둘씩 모으기 시작했고, 외국가는 지인들에게 갈피표를 사다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심지어 오래된 갈피표는 경매로 구입하기도 했다.

이런 박 관장의 수집벽은 언제쯤 끝날까 궁금해졌다. "세계 각국의 갈피표를 대하다 보면 그들의 문화에 대해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갈피표를 수집하면 할수록 제 자신도 겸손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앞으로 100개국 이상, 갈피표 1만점 이상을 수집하고 싶고 이 목표가 이뤄지면 상설전시할 곳을 찾아 전부 기증하는게 제 꿈입니다." /김선회기자 ks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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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한창 쓰였던 생활자기 '막사발'을 부활시킨 김용문 대표가 자신의 작업장을 둘러보며 한숨을 쉬고 있다. 그는 이제 막사발을 만드는 이 가마터를 떠나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경인일보=김선회기자] "추운 겨울 어디로 나가야 한단 말입니까. 12년을 이어왔던 오산세계막사발 축제도 이대로 끝내야 합니까?"
 
오산시 궐동에 위치한 빗재가마 도예연구소. 장작가마와 여기저기에 자리잡은 컨테이너들이 눈에 띈다. 이곳의 대표인 김용문(55)씨는 경기도에 막사발이라는 것을 소개하고 '오산 세계막사발 축제'를 만들어 일반인들에게까지 막사발을 각인시킨 장본인. 이런 노력 때문에 막사발은 지난 2006년 문화부에서 정한 한국민족문화 100대 상징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그가 삶의 터전이자 작업장인 이곳을 떠나야 한다. 오산세교 2지구로 지정돼 택지개발이 들어갈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미 그의 작업장을 제외하고 주변은 모두 아파트로 변해버렸다.

"제가 있는 곳은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온 종중땅이에요. 이곳에서 15년간 작품활동을 하며 장작가마 제작과 수장고, 집기 설치 등을 위해 5억원 정도 대출까지 받았는데 보상비용은 겨우 1억원 남짓입니다. 이 돈을 가지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어요. 매달 나가는 이자비용만 400만원이 넘고 최근엔 이자도 감당이 안돼 연체하기 시작했어요. 장작가마 하나 설치하는데 5천만~6천만원 정도가 들고, 시설도 시설이지만 우선은 땅이 있어야지요. 1억원 가지고 어디에다 땅을 사고 시설물과 집을 짓습니까. 참 답답합니다."

막사발은 조선시대에 일반서민들이 밥그릇이나 국그릇, 술잔 등의 용도로 쓰기 위해 만들었던 생활자기를 말한다. 그는 막사발의 영어이름을 'macsabal'로 명명하고 막사발 보급의 전도사로 나서는 한편, 세계를 돌아다니며 도예인들을 초대해 세계 막사발축제를 개최해 왔다.

"얼마전 350년 된 조상묘를 이장하게 됐어요. 그런데 그곳에서 선조들이 쓰던 막사발의 파편이 나온 거예요. 그래서 '아 정말 나는 막사발에 목숨을 걸고 살아야 하는 운명인가보다' 하는 생각까지 했어요. 그런데 제 주위를 한번 둘러 보십시오. 개발논리에만 밀려서 전통도예를 지키는 사람들을 내쫓는 형국 아닙니까. 내년부터 세계막사발축제의 명맥이 끊기는 것은 물론이고 어렵게 부흥시킨 막사발이라는 브랜드 자체가 없어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는 끝으로 정치적 발언으로 봐도 좋다며 사람들이 왜 시군간 통합을 반대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사실 옛날에는 수원, 오산, 화성이 다 같은 생활권이었어요. 시군간의 통합이 이뤄지면 문화적인 결집력이 더 생겨서 예술인들에 대한 육성과 지원도 더 커질텐데 안타깝습니다. 어느 시군이든 제가 가진 작품을 받아주고 저에게 작업할 공간만 준다면 거기로 달려가고픈 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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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가 무오(1798)년 12월 10일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어찰과 편지겉봉. 겉봉(아래쪽)에는 만천명월주인옹이라는 봉함인이 찍혀있고, 어찰 본문(위)에는 만천명월주인옹과 정구팔황호월일가 라는 인장이 찍혀있다.
/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 어찰중 역사적으로 가히 최고라 할 수 있는 '정조 어찰'이 새롭게 발견됐다. <인터뷰 9면>심환지의 6대 후손인 심천보(58)씨가 소장하고 있는 비밀어찰에는 정조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인장을 3개나 찍었다. 이는 최근 연구된 299통의 어찰과는 또 다른 것으로 정조가 무오(1798)년 12월 10일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다.

   
편지 겉봉에는 단규개탁(端揆開坼·우의정은 열어보라)이라고 써 있다. 이는 임금이 아니고서는 사용할 수 없는 문구다. 또한 편지 내용 끝에는 기존 어찰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인장이 2개나 찍혀있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정구팔황호월일가(庭衢八荒胡越一家)가 그것이다.

그리고 편지를 봉할때 봉함인인 만천명월주인옹을 한 번 더 찍었다. 정조가 지난 1798년 12월3일부터 '만천명월주인옹'(하나의 달이 만 개의 시내에 비친다는)이라는 호를 사용한 지 딱 1주일 만에 도장을 찍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 호는 임금인 자신의 덕화(德化)가 만백성에게 널리 미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이번 어찰의 내용은 채제공(蔡濟恭·1720~1799), 홍락성(洪樂性·1718~1798), 김종수 (金鍾秀·1728~1799), 김희(金憙·1729~1800), 심환지(沈煥之·1730~1802) 등 조정의 주요 대신들의 안부를 물으며 송구영신(送舊迎新)의 뜻을 전달한 것이다. 편지 말미에는 무오(1798)년 12월 10일 '만천명월주인옹'이라고 써있다.

최근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한국고전번역원과 함께 정조어찰 299통을 번역한 박철상(고문헌연구가)씨는 "지금까지 발견된 어찰에는 수신자나 발신자의 이름이 없는 반면 이번에 새로 발견된 어찰에서는 정조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인장이 3개나 찍혀있고 유일하게 자신이 편지를 쓴 날짜를 밝혔다"며 "희소적 가치나 보존상태로 보아 굉장한 의미를 지닌 어찰"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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