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30일 모스크바에서 막을 내린 '제14회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 음악가 5명이 한꺼번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하는 쾌거를 올렸다.

남녀 성악 부문에서 각각 1위를 차지한 것은 물론 피아노 부문에서 2·3위, 바이올린 부문에서 3위에 오르는 등 5명이나 수상하게 된 것이다. 안양 출신의 베이스 박종민(25)씨는 바로 이 날의 주역이었다. 그는 대회 기간 중 차이콥스키 가곡과 아리아, 베르디 아리아, 하이든 천지창조 아리아, 슈베르트 가곡, 로시니 아리아, 아일랜드 가곡, 브리튼 아리아 등을 불러 당당하게 1등을 차지했다. 현재 독일 함부르크 국립극장 전속가수로 활동 중인 그와 이메일 인터뷰를 시도했다.

■ 실제 태어나고 자란 곳은 어디입니까? 언제부터 음악을 좋아했나요?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안양시 비산동입니다. 성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아주 좋아했고 노래 부르는 것은 저의 특기 중 하나였습니다. 중학교 시절에는 학교 합창부에서 활동하면서 안양시 대회에 나가 상을 받았던 기억과, 고등학교 때에는 학교 밴드부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면서 여러 공연을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어머니께서는 제가 음악을 좋아하는 걸 아셨었는지 어렸을 적부터 항상 음악을 가까이 할 수 있게 도와주셨습니다."

   

■ 평촌고등학교 2학년때 성악을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에 비해 조금은 늦게 시작한 것 같은데요.

"처음엔 무척 걱정이 많았습니다. '내가 진로를 너무 늦게 정한 건 아닌지' 혹은 '이래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지' 등 부모님께서도 많이 걱정하셨고, 학교 선생님들도 다른 전공으로 옮기기를 권유하셨습니다. 하지만 '남들보다 뒤쳐져 있다'라는 점이 저를 더욱 자극했고, 오히려 저를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더 일찍 시작했다면 클래식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공부할 수 있었겠지만 다른 악기와 다르게 성악, 특히 남자 파트는 변성기의 영향이 크기 때문에 변성기가 지난 후에 시작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 이탈리아 유학에 이어 현재 독일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유학을 가기까지의 과정과 현재 생활이 궁금합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3학년 재학 중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리는 벨베데레 콩쿠르에 참가를 했었습니다. 그 때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라 스칼라 극장 관계자에게 발탁이 돼 이탈리아 정부 장학생으로 유학을 오게 됐습니다. 그 후 3년간 이탈리아 라 스칼라 극장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한 후 오디션을 거쳐 이 곳 독일 함부르크로 오게 됐습니다. 현재 함부르크 국립극장에는 저를 포함한 총 4명의 한국인 전속가수가 있고, 총 6명의 한국인 합창단원이 있습니다. 요즘 대중문화에서도 한류의 바람이 전 세계에 거세게 불 듯, 이 곳 독일에 있는 수 많은 극장 중에 한국인이 일을 안 한다는 극장이 없을 정도로 독일과 유럽 그리고 세계 무대에서의 한국 성악가들의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생활면에서는 크게 어려운 것은 없는데, 외국에 나와 혼자 생활해 보니 부모님의 자리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습니다. 특히 몸이 아프거나 할때요."


■ 차이콥스키 콩쿠르 기간 중 본인이 느낀 대회 분위기나 관객들의 반응 정도는 어땠습니까? 혹시 우승은 예상했는지요.

"이번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세계 3대 콩쿠르로서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그동안 러시아 참가자들에게 편파적이었던 악습을 개선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실례로 심사위원을 전면 교체하고,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에 경연을 생중계해 네티즌의 평가를 반영하는 등 투명하고 객관적인 심사체계를 갖추었습니다. 따라서 그 어느해 보다도 공정한 평가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에 가기 전 저는 현지 관객들이 무지 차갑고 이방인에게 배타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와 정반대였어요. 다른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너무나도 뜨거운 환영과 박수를 받아 놀랐습니다. 대회 당일 컨디션은 좋았지만 노래 부르는 홀이 너무나 덥고 건조한데 규정상 심사위원이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해 약간의 어려움을 겪었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실수하지 않고 부른다면 결선에 올라갈 수 있겠다라고 생각은 했지만 1등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 앞으로의 계획과 종민씨처럼 되길 원하는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현재 일하고 있는 함부르크 극장을 비롯해 유럽에서 좀 더 활동했으면 하는 바람이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좋은 분들과 함께 고국 무대에도 서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후배들에게는 일단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실기, 이론 공부에 충실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만약 유학을 생각한다면 미리미리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적인 공부도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선회기자 ksh@kyeongin.com
 


※ 박종민은?

1986년 11월 17일 안양에서 태어나 2005년 평촌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했다. 국내에서는 최현수·배용남을 사사했으며, 2010년 이탈리아 라 스칼라(La Scala)가극장 오페라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현재 독일 함부르크 국립극장 전속가수로 활동중이다. 2011년 차이콥스키 국제콩쿠르 성악부 1위를 비롯해 페루쵸 탈리아비니(Ferruccio Tagliavini) 국제콩쿠르 1위, 스텔라 마리스(Stella Maris) 국제콩쿠르 1위 및 청중상, 빌바오(Bilbao) 국제콩쿠르 1위 및 평론가상, 플라시도 도밍고 오페랄리아(Operalia) 국제콩쿠르 특별상, 벨베데레(Belvedere) 국제콩쿠르 특별상, 한국음협 콩쿠르 1위, 이대웅 콩쿠르 1위, 국립오페라단 콩쿠르 금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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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명의 남자 신데렐라가 탄생했다. 야식배달부 김승일(34).

지난해말 SBS 예능 프로그램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서 자신을 야식배달부라고 소개한 그는 오페라 투란도트의 주제곡인 '네순도르마(Nessun dorma)'를 열창했다. 그의 노래가 흐르자 방송국 세트에 나와 있던 MC와 출연자는 물론 시청자들 대다수가 감동에 북받쳐 눈물을 흘렸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성악과 교수는 "평생 이런 음색은 들어본 적이 없다"며 "앞으로 100일간의 레슨을 통해 이 청년을 새롭게 탄생시켜주겠노라"고 공언했다. 그후 그는 어떻게 됐을까.

4월 2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공개된 김승일씨의 모습은 180도 달라져 있었다. 터틀넥 티셔츠와 점퍼 대신 단정한 턱시도를 입고, 곱게 분장한 모습은 영락없는 성악가의 모습이었다. 40인조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춰 '오 솔레 미오(O Sole Mio)', '그라나다(Granada)', '사랑의 찬가'를 여유롭게 부르는 모습에 시청자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다소 불안했던 표정 대신 한층 여유로운 모습이었고, 노래할 때 아무 동작도 없었던 초기 모습과는 달리 음악의 리듬을 타며, 손짓과 몸짓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그에게 청중들은 열렬한 환호와 함께 박수를 보냈다. 김승일씨의 변화된 모습이 방송을 타기 직전 경인일보 취재팀은 용인의 한 연습실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수원에서 열릴 단독공연 준비를 하며 한창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어떤 공연을 준비하고 계시나요.

"오는 4월 24일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열릴 '내 생애 첫 번째 공연'을 위해 연습중입니다. '내 생애 첫 번째 공연'은 제목처럼 여러가지 여건 때문에 공연은 하고 싶으나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무대인데요. 방송에서 선보였던 '네순도르마'를 비롯해 가곡과 팝송 등 총 5곡 정도 부를 예정입니다. 그리고 제가 중심이 되긴 하지만 저를 도와 몇몇 분들이 무대에 함께 서서 공연을 해주실 거구요. 공연 수익금은 전액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쓰일 예정입니다."

-어떻게 공연이 성사된 건가요.

"배우 조재현씨가 경기도문화의전당 이사장을 맡고 계신데요. 우연히 TV에 출연한 저를 보시고,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드셨나봐요. 그래서 방송국을 찾아가 담당 PD를 만나셨고, 결국 저와 연결돼서 공연이 성사됐죠. 사실 제가 수원에서만 30년 넘게 살고 있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야식 배달하면서 경기도문화의전당을 많이 쳐다보곤 했거든요. '언젠가는 저 무대에 한 번 꼭 서보겠다'고 다짐했는데, 그게 현실로 이뤄져서 꿈만 같습니다."

-유년 시절과 학창시절이 궁금한데요, 어땠습니까.

"원래 고향은 전북 익산이구요. 목수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4살때 수원으로 이사와서 그때부터 죽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중동 건설붐이 한창일 때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니면서 저희 4남매(3남1녀)들을 키우셨구요. 어머니도 틈틈이 일을 하셨어요. 집안이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아주 어렵지는 않았어요. 저는 중학교때부터 노래에 조금 소질이 있어서 가요를 많이 불렀어요. 웬만한 노래 경연대회에서는 학급 대표로 나갈 정도였죠. 그런데 고등학교(삼일고)에 입학해 우연히 축제 오디션에 참가했는데, 거기서 어이없게도 예선 탈락을 한거예요. 태어나 처음으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죠. 하지만 그 이후에 선후배들과 함께 '모비딕'이라는 밴드를 결성해서 라디오 방송도 출연하고 그랬으니까 아무튼 그때 경험이 저에게는 약이 된 셈이죠."

-그럼 원래 꿈이 성악가가 되는 것은 아니었군요.

"기타를 치게 되고 여러 가요를 섭렵하면서 김종서씨를 알게 됐구요. 그 분 노래를 많이 따라 불렀어요. 그런데 저희 고등학교 합창반 선생님이 제가 노래하는 것을 지켜보시더니 성악을 한번 배워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하셨어요. 전 원래 졸업후 바로 취업하려고 실업고에 진학한 것인데, 그때 제 운명이 바뀐게 된거죠. 대학 입시를 앞둔 5~6개월 전쯤부터 성악과 교수님께 레슨을 받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처음에는 성악이 참 재미없더라구요. 그러다보니 레슨도 자주 빠지게 되고 성악을 포기할까도 여러 번 생각을 했죠. 하지만 주위에서 '잘한다 잘한다' 자꾸 하니까 조금씩 흥미가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이 길을 가야겠구나하고 생각했어요."

-방송에서 밝혔듯 어렵게 들어간 대학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는데요.

"대학생활은 고등학교랑은 좀 달랐던 것 같아요. 동기들은 대부분 예중·예고를 거쳤기 때문에 기본 발성, 호흡, 음정 등 기본기가 잘돼 있었거든요. 하지만 저는 레슨 기간이 짧다보니 처음부터 좀 차이가 있었죠. 게다가 음악하는 친구들은 거의 다 유복한 편이었어요. 그런 문화적 차이때문에 수업 끝나면 바로 사라지곤 했죠. 그러다보니 1학년때 성적은 별로 안좋았어요. 그러던 중 1학년 말에 어머니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셨어요. 그때 저는 학업을 중단하는 것이 낫겠다싶어 자원입대를 하게 됐습니다. 다행히도 군악대에 들어가 성악은 계속할 수 있게 됐죠. 제대 후에는 자진유급해서 2학년이 아닌 다시 1학년으로 복학해 정말 열심히 학교생활을 했어요. 필기는 물론 실기 모두 1등 할 정도로. 그런데 호전되셨던 어머니께서 다시 쓰러지셨죠. 그땐 가정형편이 썩 좋지 않아서 학업을 아예 그만 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학을 그만 두고 어떤 일을 했습니까.

"학교를 그만 두고 어떤 일을 할까 하다가 당시에 환율 차이가 10배 이상 나니까 무작정 일본에 가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는 사람도 없었는데 고등학교때 제2외국어로 일어를 한 것만 믿었죠. 막상 관광비자로 일본 도쿄에 가서 일자리 찾아봤는데, 취직이 결코 쉽지 않겠더라구요. 그래서 무작정 열흘간 돌아다니다 결국 일자리를 못찾고 귀국했죠. 그런 후에 서울 강북에 있는 한 주점에 웨이터로 들어갔어요. 그리고 그 곳에서 큰 충격을 받았죠. 사람들이 몇 십만원은 쉽게 쓰는 것을 본거예요. 그때 속으로 '아 돈이 이런 쪽으로 이렇게 도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제가 일한 첫날 수입이 25만원이었으니까 말 다한 셈이죠. 그 이후에 수원에 있는 나이트클럽에서 웨이터 보조를 했어요. 그리고 택배, 퀵서비스, 부동산 중개보조원, 통닭 배달 등 돈만 많이 준다면 닥치는대로 일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야식 배달과 인연을 맺었는데, 열심히 일하면 성과급도 있고, 일을 하다보니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맘도 편하고 해서 7년이나 일하게 됐습니다."



-TV 출연으로 유명인이 됐는데, 아직도 야식 배달을 하십니까.

"방송으로 얼굴이 많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배달 주문을 할때 '김승일을 보내라'고 자꾸 전화하셔서 사장님이 일을 좀 줄여 주셨어요. 요즘엔 새벽 5시에 나가서 배달이 좀 줄어드는 오후에 퇴근해요. 그리고 사실 방송 출연을 했다고 해서 생계가 나아지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원래 방송 나가기 전에 야식집 말고 다른 부업하려고 준비도 하고 있었거든요. 노점에서 옷도 팔까하고 생각했었구요. 그런데 얼굴이 알려지면서 그런 부업들을 포기해야 했어요. 지금은 음악공부에 좀더 치중하고 있는 중입니다."

-방송에 출연하게 된 계기가 야식집 사장님 때문이라고 하던데요.

"제가 어느 날 휴대전화기에 제 노래를 녹음해서 사장님께 들려줬어요. "아 이 분 참 잘하지 않아요? "라면서요. 그때 사장님이 "어 ! 굉장히 잘하네"하고 반응을 보이셨죠. 그래서 그 주인공이 저라고 하니까 장난삼아 '스타킹'에 연락하겠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런데 얼마후에 방송 작가들한테 실제로 연락이 왔어요. 그 계기로 TV에 나가게 됐구요. 방송 출연후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야식 배달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주위에서 그러더라구요. 네 상태(인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너만 모른다구요. 그제서야 '아! 방송의 파장이 크긴 크구나' 하고 느꼈죠." 

 -방송에서 레슨하기로 해 준 교수가 불명예스럽게 하차했는데,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된 겁니까.

"그 교수님께 레슨을 3번 정도 받았는데, 갑자기 그 분이 중도하차하게 되셨죠. 인터넷 게시판에는 '안되는 놈은 뭘 해도 안되는구나'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었죠. 그런 글에 상처도 받았지만 제작진들은 물론 저를 응원해주시는 많은 팬들이 걱정해 주셔서 제가 다시 무대에 설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얼마후 저의 사정을 알게 되신 성악가 배재철 선생님께서 새로운 멘토로 참여해 저를 도와주시게 됐어요. 사실 그 분도 갑상선 암에 걸려 노래를 못하실 만큼 어려움을 겪으셨는데, 그것을 극복하시고 현재 세계적인 테너로 꾸준한 활동을 하고 계시거든요. 그 분께 많은 것을 배웠고, 또 배울 예정입니다."

-결국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우연히 시작한 성악이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요.

"음악은 저에게 있어 꿈을 이뤄준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나이가 적은 편은 아니어서 아직은 두려움도 많습니다. 기회만 된다면 다른 아르바이트를 정리하고 음악으로만 승부를 걸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이 있었기에 제가 TV에 출연할 수도 있었고, 과분하게 큰 무대에 설 수 있게 됐습니다. 제가 음악인으로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선회 기자 ksh@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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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잃지 마세요. 사람은 누구나 잘할 수 있는 일이 꼭 있습니다."

지난주 작지만 의미있는 전시회가 한 건 열렸다. 수원시 가족여성회관 내 전시실에서 열린 '흙 그리고 나'展에는 수원지역 자활센터에서 운영중인 '흙지기 도예공방' 회원 9명이 만든 생활자기 작품들이 전시됐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전시회였지만 도예 공방의 리더인 신경우(46)씨의 강력한 의지가 없었다면 전시회 자체가 불가능했을 만큼 많은 사연이 담긴 전시였다.




10년전 신씨 가족은 가장의 사업 실패로 갑작스레 빚더미에 앉게 됐다. 신씨의 남편은 빚쟁이들의 성화에 시달려 가출까지 하게 됐고, 신씨와 어린 딸은 라면으로 매 끼니를 이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이후 그는 하루에도 아르바이트 3~4개씩을 해가며 억척스러운 생활을 했다. 목욕탕 청소, 식당 설겆이, 가사도우미 등 안 해 본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했지만 늘어나는 이자와 생활비를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몸이 너무 고되고 힘들어서 자살을 결심했었어요. 18층 높이의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서 뛰어내리려고 바닥을 한참동안 쳐다봤죠. 그런데 문득 친정어머니가 걱정하시는 게 눈에 선하게 보이는 거예요. '얘야, 그것밖에 안 되니?' 하시며 질책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그때 죽을 용기로 다시 한 번 살아보자고 결심했어요."

신씨는 곧바로 동사무소를 찾았다. 그곳 직원들에게 무작정 살려달라고 했다. 신씨의 딱한 사정을 들은 한 직원은 수원에 자활센터가 있는데 그곳에서 일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 당시 자활센터에는 청소·방역, 간병사업, 도예 사업 등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신씨는 도예 부문을 선택했다.

"원래 학창시절에 미술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도자기 만드는 법을 배우면 월급도 준다는 말에 너무 기뻤죠. 이런 일석이조의 기회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저에게는 적성에 딱 맞았어요." 


 한 달에 70만원의 월급을 받으며 신씨는 열심히 화분, 화병, 찻잔 등 생활자기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월급의 대부분을 저축하며 삶의 대한 의지를 다졌다. 작업을 하다 보니 어느새 다른 이들보다 실력이 월등함을 느끼게 됐고, 도예공방의 리더까지 됐다. 이번 전시는 이런 삶의 고난을 넘어선 신씨의 제안으로 마련된 첫 번째 전시였던 것이다.

"딸과 함께 희망을 잃지 않고 한푼두푼 저축하다 보니 이제 빚이 몇 천만원밖에 남지 않았어요. 이 소식을 듣고 남편도 쑥스럽지만 집으로 돌아오게 됐죠. 지금은 가족이 다시 뭉쳐 열심히 살아가고 있답니다. 바람이 있다면 저랑 같이 일하고 있는 자활회원들의 모든 소망이 이뤄졌으면 좋겠어요. 그들도 모두 각자의 꿈이 있거든요."
/김선회기자ks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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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노철화백이 수원화성박물관을 방문, 자신이 20여 년 전에 그린 '화성전도'를 살펴보고 있다.

"아! 이 그림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지난 13일 수원화성박물관 특별 기획전으로 마련된 '그림, 화성을 품다'展에서 한 노화백이 대형 그림앞에 서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금세 그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華城(水原城)全圖'라고 이름 붙여진 이 그림은 이번 전시의 메인 작품. 10폭짜리 병풍에 그려진 이 대작은 200여년전 화성의 모습을 복원한 것으로 그림을 바라보며 탄식하던 이는 바로 이 그림을 그린 주인공인 기노철(74) 화백.

그림 왼쪽에는 그림을 완성한 시기인 辛未(1991년) 孟夏(초여름)라고 적혀있고 바로 옆에 화백의 낙관이 선명하게 들어있어 그림을 그린 이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기구한 사연이 있다.

"이 그림은 한 사업가에게 부탁받아 그린거예요. 화성에 대한 그림을 그려달라고 해 화성 일대를 돌며 몇달을 취재했죠. 난 화성이 원래 축조됐을때 당시 모습을 그리고 싶었기에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고증을 받았어요. 제가 예전 투시도를 배워 나름대로 건축물을 잘 그렸죠. 이 그림은 산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것처럼 화성을 생생하게 묘사한 겁니다."

기노철 화백은 화성 주변에 살았던 노인들의 구술과 답사를 통한 거리측정, 그리고 상상력을 더해 예전 화성 모습을 완벽하게 복원했다. 그림속 남공심돈(팔달문 옆에 있다가 현재는 사라짐), 성곽안의 초가집들과 성곽 밖의 평야, 비석이 많이 있던 마을 등은 최근 발견된 사진과 자료 등을 통해 그 실체가 충분히 입증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공들여 그린 그림을 구입한 사업가는 기업 홍보를 위해 그림을 실컷 전시한 후 작품 대금 지불을 차일피일 미루다 그만 중국으로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다.

"지금이야 이렇게 얘기할 수 있지만 그때는 너무 화가 나 죽고싶은 심정이었어요. 가족들한테도 말도 못하고. 몇달을 혼자 속앓이하다 결국은 그냥 잊어버리기로 했죠. 그렇게 20년이 흘렀는데, 어느날 수원화성박물관에 내 그림이 걸린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왔죠."

이 그림은 몇 사람의 손을 거쳐 몇 해 전 경기대학교 박물관에서 구입, 보관해오고 있다. 이번 전시는 경기대 박물관의 소장품과 수원지역 작가 15명이 참여해 수원 화성의 모습을 담은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제라도 그림을 다시 보게 돼 다행이에요. 앞으로도 박물관에서 그림 보관을 잘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화성의 원래 모습에 대해 알았으면 합니다." 대작을 남긴 화백은 이 말을 남기고 쓸쓸히 전시장을 나섰다. / 김선회기자 ksh@kyeonig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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