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힘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저는 문화적 가치, 그 중에서도 글자에 있다고 믿습니다."

한글이 갖고 있는 음과 뜻을 이용해 독특한 문자 조형세계를 이뤄낸 심응섭(사진) 순천향대 명예교수를 충남 예산군 삽교읍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났다.

작업실에 들어서자 '효행'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원래 효행(孝行)은 '어버이를 잘 섬기는 행실'이라는 뜻의 한자지만, 그가 한글로 쓴 효행은 마치 갓을 쓴 선비 옆에 강아지가 꼬리를 치며 졸졸 따라가고 있는 모양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부모를 섬기는 마음'이라고 적혀 있다. 아마도 '효행'이란 주인에게 충실한 강아지의 행동과도 같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리라.

효행 외에도 그의 작업실 안팎에는 '형통', '배움', '스승', '행복', '웃음' 등의 글자로 만든 캘리그래피 작품이 가득하다. 심 교수가 쓴 글자를 보고 있노라면 그 단어가 품고 있는 뜻이 자연스럽게 연상돼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런데 그의 전공은 뜻밖에도 행정학이었다. 대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20여년간 행정학만을 가르친 후 정년퇴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떻게 이런 작품들을 만들 수 있었을까.

"서예와의 인연은 군 시절에 비로소 시작됐다고 봐야죠. 당시 전라도 광주에서 복무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외출을 나갔다가 우연히 한옥 대청마루에서 수염을 허옇게 기른 노인이 모포를 깔아 놓고 대붓으로 글씨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됐어요. 한눈에 봐도 그분이 서예의 고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그분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 글씨를 배울 수 없겠느냐고 여쭤봤죠. 하지만 그 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어요." 그 뒤로 세 번을 더 찾아가 똑같은 질문을 한 뒤에야 노인은 겨우 입을 뗐다. "군인이 글씨 배울 수 있당가?"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백발 노인은 호남 서맥을 계승한 송곡(松谷) 안규동 선생이었다. "선생님은 처음엔 그저 군인이 호기심으로 물어본 것이라 여겨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던 것이었죠. 하지만 네 번씩이나 자신을 찾아온 젊은이의 진정성에 마음을 열고 저를 제자로 받아주신 겁니다."

심 교수는 군 시절 부대 관계자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외출 허락을 받아 안규동 선생에게 서예수업을 받았으며, 제대 이후에도 다시 그를 찾아가 15년간 사제지간의 인연을 이어나가게 된다. 스승에게 해서, 행서, 초서 등 한자의 모든 서체를 배운 그는 대학 4학년 때 문득 한글로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한글이 우수한 문자라고 말은 하면서 정작 서예인들은 한글 작품을 등한시했어요.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이후 저는 청계천 근처의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한글필첩을 수집하기 시작했어요. 마음에 드는 글씨체를 발견하면 연필로 각을 그려가면서 그것을 따라했어요. 이 결과 각종 전시회에서 한글 작품으로 수상도 하게 되고 자신감을 얻게 됐죠."

그는 1975년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연 후 1999년 한국인 최초로 서예의 종주국인 중국에서 한글작품으로 전시회를 가졌는데 이것이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한글 하면 주로 궁체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제 글씨는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독특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외국인들이 더 좋아했던 것 같아요. 베이징에서의 호평 이후 일본 도쿄, 독일 베를린, 러시아 모스크바에서도 한글작품으로만 전시했는데, 이 모든 것이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시도한 것입니다."

 
한글날을 며칠 앞둔 시점에서 심 교수는 국회의원들 금배지에 왜 '국(國)'자가 한자로 들어가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해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분들께서 왜 한글 대신 꼭 한자를 써야만 할까요. 정치인들이 모범을 보이지 않는다면 국민들이 어찌 따르겠습니까? 한글사랑에 평생을 바친 주시경 선생께서는 '나라를 보전하는 자는 자국의 글과 말을 먼저 닦는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사소한 것부터 하나씩 고쳐나가야 한글이 계승되고 발전할 수 있는 겁니다. 저는 앞으로도 '모국어 사랑이 곧 나라사랑'이라는 일념으로 우리 한글을 세계 문자예술의 독보적인 존재로 만들고 싶습니다." /김선회기자 ks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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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30일 모스크바에서 막을 내린 '제14회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 음악가 5명이 한꺼번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하는 쾌거를 올렸다.

남녀 성악 부문에서 각각 1위를 차지한 것은 물론 피아노 부문에서 2·3위, 바이올린 부문에서 3위에 오르는 등 5명이나 수상하게 된 것이다. 안양 출신의 베이스 박종민(25)씨는 바로 이 날의 주역이었다. 그는 대회 기간 중 차이콥스키 가곡과 아리아, 베르디 아리아, 하이든 천지창조 아리아, 슈베르트 가곡, 로시니 아리아, 아일랜드 가곡, 브리튼 아리아 등을 불러 당당하게 1등을 차지했다. 현재 독일 함부르크 국립극장 전속가수로 활동 중인 그와 이메일 인터뷰를 시도했다.

■ 실제 태어나고 자란 곳은 어디입니까? 언제부터 음악을 좋아했나요?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안양시 비산동입니다. 성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아주 좋아했고 노래 부르는 것은 저의 특기 중 하나였습니다. 중학교 시절에는 학교 합창부에서 활동하면서 안양시 대회에 나가 상을 받았던 기억과, 고등학교 때에는 학교 밴드부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면서 여러 공연을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어머니께서는 제가 음악을 좋아하는 걸 아셨었는지 어렸을 적부터 항상 음악을 가까이 할 수 있게 도와주셨습니다."

   

■ 평촌고등학교 2학년때 성악을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에 비해 조금은 늦게 시작한 것 같은데요.

"처음엔 무척 걱정이 많았습니다. '내가 진로를 너무 늦게 정한 건 아닌지' 혹은 '이래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지' 등 부모님께서도 많이 걱정하셨고, 학교 선생님들도 다른 전공으로 옮기기를 권유하셨습니다. 하지만 '남들보다 뒤쳐져 있다'라는 점이 저를 더욱 자극했고, 오히려 저를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더 일찍 시작했다면 클래식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공부할 수 있었겠지만 다른 악기와 다르게 성악, 특히 남자 파트는 변성기의 영향이 크기 때문에 변성기가 지난 후에 시작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 이탈리아 유학에 이어 현재 독일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유학을 가기까지의 과정과 현재 생활이 궁금합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3학년 재학 중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리는 벨베데레 콩쿠르에 참가를 했었습니다. 그 때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라 스칼라 극장 관계자에게 발탁이 돼 이탈리아 정부 장학생으로 유학을 오게 됐습니다. 그 후 3년간 이탈리아 라 스칼라 극장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한 후 오디션을 거쳐 이 곳 독일 함부르크로 오게 됐습니다. 현재 함부르크 국립극장에는 저를 포함한 총 4명의 한국인 전속가수가 있고, 총 6명의 한국인 합창단원이 있습니다. 요즘 대중문화에서도 한류의 바람이 전 세계에 거세게 불 듯, 이 곳 독일에 있는 수 많은 극장 중에 한국인이 일을 안 한다는 극장이 없을 정도로 독일과 유럽 그리고 세계 무대에서의 한국 성악가들의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생활면에서는 크게 어려운 것은 없는데, 외국에 나와 혼자 생활해 보니 부모님의 자리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습니다. 특히 몸이 아프거나 할때요."


■ 차이콥스키 콩쿠르 기간 중 본인이 느낀 대회 분위기나 관객들의 반응 정도는 어땠습니까? 혹시 우승은 예상했는지요.

"이번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세계 3대 콩쿠르로서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그동안 러시아 참가자들에게 편파적이었던 악습을 개선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실례로 심사위원을 전면 교체하고,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에 경연을 생중계해 네티즌의 평가를 반영하는 등 투명하고 객관적인 심사체계를 갖추었습니다. 따라서 그 어느해 보다도 공정한 평가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에 가기 전 저는 현지 관객들이 무지 차갑고 이방인에게 배타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와 정반대였어요. 다른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너무나도 뜨거운 환영과 박수를 받아 놀랐습니다. 대회 당일 컨디션은 좋았지만 노래 부르는 홀이 너무나 덥고 건조한데 규정상 심사위원이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해 약간의 어려움을 겪었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실수하지 않고 부른다면 결선에 올라갈 수 있겠다라고 생각은 했지만 1등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 앞으로의 계획과 종민씨처럼 되길 원하는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현재 일하고 있는 함부르크 극장을 비롯해 유럽에서 좀 더 활동했으면 하는 바람이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좋은 분들과 함께 고국 무대에도 서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후배들에게는 일단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실기, 이론 공부에 충실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만약 유학을 생각한다면 미리미리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적인 공부도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선회기자 ksh@kyeongin.com
 


※ 박종민은?

1986년 11월 17일 안양에서 태어나 2005년 평촌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했다. 국내에서는 최현수·배용남을 사사했으며, 2010년 이탈리아 라 스칼라(La Scala)가극장 오페라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현재 독일 함부르크 국립극장 전속가수로 활동중이다. 2011년 차이콥스키 국제콩쿠르 성악부 1위를 비롯해 페루쵸 탈리아비니(Ferruccio Tagliavini) 국제콩쿠르 1위, 스텔라 마리스(Stella Maris) 국제콩쿠르 1위 및 청중상, 빌바오(Bilbao) 국제콩쿠르 1위 및 평론가상, 플라시도 도밍고 오페랄리아(Operalia) 국제콩쿠르 특별상, 벨베데레(Belvedere) 국제콩쿠르 특별상, 한국음협 콩쿠르 1위, 이대웅 콩쿠르 1위, 국립오페라단 콩쿠르 금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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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방송사마다 사극물을 편성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SBS 드라마 '무사 백동수'가 월화극 시청률 1위 자리를 지키며 독주를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인기에 힘입어 백동수의 실제 삶을 궁금해하는 시청자들도 많이 생겨났다. 역사속의 실존 인물인 백동수(白東修·1743~1816)를 국내 최초로 발굴해 낸 사람은 현재 수원에 거주하고 있는 김영호(48)씨다. 그는 대구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중 우연히 접한 '한국의 전통무예'라는 책 한 권 때문에 삶의 진로를 완전히 바꿨다.

그 책은 감옥에서 빗자루를 들고 무술을 연마했다 해서 '빗자루 도사'로 알려진 임동규 선생이 쓴 것인데, 우리 고유의 무예에 중국·일본 무예의 장점을 합친 '24반 무예(무예24기)'의 형성 과정과 유래, 기본동작을 그림과 곁들여 해설한 책이다.

김씨는 이 책을 읽고 1990년 여름, 임동규 선생이 있던 광주로 찾아가 막노동으로 신혼살림을 꾸리며 무예24기를 익혔다. 그러면서 그는 무예24기의 원전이라 할 수 있는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무예도보통지는 정조가 직접 편찬의 방향을 잡은 후 당시 규장각 검서관이었던 이덕무·박제가와 장용영 장교 백동수 등에게 명령해 만들게 된 무예 훈련 교범입니다. 다른 군사서적들이 전략 ·전술 등 이론을 위주로 한 것임에 비해 이 책은 전투 동작 하나하나를 그림과 글로 해설한 실전 훈련서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이덕무·박제가는 많이 알려져 있었는데 비해 백동수라는 사람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어요. 호기심이 생겼죠. 그때부터 부족한 한문 실력으로 백동수가 관련돼 있을만한 역사책을 뒤지기 시작했어요."

김씨는 무려 7년여의 노력 끝에 무예도보통지의 편찬 총감독을 맡아 조선 무예의 역사에 중요한 획을 그은 백동수와 한국 무예의 역사, 조선 무사의 이야기를 다룬 '조선의 협객 백동수'를 2002년에 펴냈다. 바로 백동수가 세상 밖으로 드러나게 된 첫 순간이었다.

이 책이 나온 후 백동수의 삶을 모티브로 한 역사소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학계에서도 백동수 관련 논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관심에 힘입어 각 방송국에서는 몇 년 전부터 김씨에게 백동수 드라마를 만들자고 여러 차례 제의했고, 실제 계약 성사 직전까지 갔는데, 막상 드라마 판권 계약은 엉뚱하게도 김씨의 책을 참고해 만화책으로 만든 스토리 작가와 이뤄졌다. 백동수를 처음 발굴해 낸 김씨로서는 참으로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참고삼아 드라마를 시청했던 그는 본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황당무계한 설정과 역사적 왜곡때문에 계속 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정조시대에 실제로 활약했던 백동수는 드라마 속 주인공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TV에서 백동수는 천방지축의 꽃미남 무예 고수로 그려지고 있는데, 실제 백동수는 북한산에서 무뢰배들과 충돌했을 때 상대 두목이 그의 얼굴만 보고 슬그머니 줄행랑을 놓았을 정도로 험상궂고, 몸이 날렵하며 힘이 장사였어요. 그는 이십대에 이미 주먹세계를 평정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서얼 출신이었기 때문에 벼슬길이 막히자 미련없이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기린에 들어가 가축을 기르고, 무예를 연마하며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마흔을 훌쩍 넘긴 1785년에야 비로소 정조 임금이 그를 선전관에 임명했고, 이때부터 그는 그동안 갈고닦은 무예 실력을 맘껏 펼쳐 정조의 각별한 사랑을 받게 됩니다."

김씨는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사료를 더 참고해 지난달 '조선의 협객 백동수(푸른역사)' 증보판을 내놨다.

"사실 우리나라 역사가 문(文)에 치우치고 무(武)에 인색한 역사였다는 비판은 어제오늘 나온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 역사 중에서도 특히 조선시대가 이러한 지적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이 이 책에 담긴 조선 무사 백동수의 생애와 '무예도보통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에게도 자랑할만한 무의 역사와 무예인이 있었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가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김선회기자 ks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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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제(萬年堤)는 농업용 저수지가 아니라 그저 연못일 뿐입니다. 하지만 학자들은 그동안 '제(堤)'라는 글자에 얽매여, 진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만년제의 위치도 전혀 엉뚱한 데로 알고 있어 많은 예산 낭비는 물론 역사를 왜곡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경기도 화성시 화산동 152에 소재하는 만년제는 정조가 1798년 세운 것으로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隆陵) 바로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조선왕실의 소유였으나 이승만 정권때 국가에 몰수됐다가, 1990년 민간인 이모씨에게 매각됐다. 그리고 이후 여러 차례의 진통을 거쳐 1996년 경기도기념물 제161호로 지정됐다.

 


              ▲  정조의 수수께끼 만년제 / 주찬범 / 신성북스 / 228쪽, 2만3천원.

 화성 태안3지구에 오랫동안 살았던 주찬범(53)씨는 "유년시절부터 만년제의 원형을 직접 눈으로 지켜봐 왔는데, 물이 고여있던 만년제가 매립된 이후 만년제의 위치를 제대로 찾지 못해 엉뚱하게 도로를 내고, 연못이 분명한 이곳을 왜 자꾸 학자들이 농업용 저수지라고 부르는지 납득이 가지 않아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그의 논리와 주장은 무척 탄탄하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수십권의 문헌과 지적도, 항공사진, 그리고 본인이 직접 만년제를 답사한 기록들을 대조해 가며 자신의 주장을 증명해 간다.

▲ 1987년도 만년제 항공촬영사진.

"많은 역사학자들과 후세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만년제는 농업용 저수지 즉 '제언(堤堰)'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가 유년시절부터 실제 현장을 살펴봤지만 만년제는 농업용 수리시설이 아니라 평지를 파서 조성한 전형적인 연못입니다. 역사기록을 살펴봐도 사업검토단계부터 완공에 이르기까지 제방을 쌓는 공정은 없었습니다. 물론 농업용 수리기능도 전혀 없었구요. 만년제는 네모난 연못 안에 둥근 섬을 인공적으로 조성한 방지원도(方池圓島)의 전형적인 형태입니다. 전경 사진을 보면 한 눈에 알 수 있어요. 이는 음양오행을 함축하고 있는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사상에 기인한 것인데, 조선은 개국 초부터 종묘, 왕궁, 왕릉 등에 조성하는 연못의 대부분을 방지원도로 만들었고, 이런 방지원도는 나아가 관아, 서원, 별장, 가옥 등에까지 속속 보급됐습니다."

 만년제와 관련된 다소 충격적인 사실도 책 곳곳에 들어있다. "1998년 한국자원연구소 측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만년제의 위치를 제대로 측정하지 못해 그 규모를 수원대 부근까지 확대, 추정해서 이후 발간되는 연구물 일체를 오류에 빠지게 했어요. 더구나 2000년에는 기전문화재연구원(현 경기문화재연구원)이 작성한 '화성태안(3) 택지개발예정지구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에 따라, 사업시행자인 대한주택공사(현 LH) 측이 사업지구에서 불과 150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만년제를 누락시킨 채 문화재청에 현상변경 허가를 신청하기도 했습니다. 2001년에는 한신대 박물관이 만든 보고서에 의거해 경기도가 이듬해 '분천~송산'간 국도 대체 우회도로공사를 실시했는데, 2004년 도로 예정지가 만년제를 침범한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공사가 6년이나 중단됐고, 이와 연계된 도로 공사들이 줄줄이 연기됨에 따라 수도권 광역 교통망의 큰 혼란과 지장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만년제의 진실을 바로잡을 때입니다. 많은 분들이 제 글을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김선회기자 ks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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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책을 통해 얻은 상상력과 창의력을 어른이 돼도 잊지 않았으면 해요."

영국 출신 세계적인 동화작가 앤서니 브라운(Anthony Browne·65·사진)이 지난달 30일 오후 경기도문화의전당을 찾았다.

어린이 전문 예술축제인 경기키즈아트페스티벌에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 원화전이 마련된 것. '미술관에 간 윌리' '동물원' '터널' '마술연필' 등 독특하고 뛰어난 작품으로 많은 한국팬을 보유하고 있는 앤서니 브라운은 전 세계 가장 뛰어난 동화작가에게 주는 '한스 크리스찬 안데르센상'은 물론 영국 최고 그림책에 수여하는 케이트 그리너웨이상을 두 번이나 받은 그림책의 거장. 그는 일주일간 머물며 사인회, 낭독회 등의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다.

한국을 두 번째 방문했다는 그에게 대다수의 작품에서 주인공을 고릴라나 침팬지로 삼는 이유를 묻자 "고릴라나 침팬지는 사람과 굉장히 닮아 자연스럽게 주인공으로 삼게 됐다"며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책에 등장하는 기본 소재와 줄거리가 제 어린 시절 경험이 바탕이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동화작가가 된 이유에 대해서는 "젊었을 때 연하장이나 생일카드를 제작했었는데, 대부분 한번 보고 버려지는 게 안타까웠다"며 "그래서 스토리가 담긴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몇 번의 습작 끝에 동화작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그는 "그림에 대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어린이들이 스스로 긴장감을 느끼고 스토리에 대해 무한 상상을 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다"며 "부모들과 아이들이 함께 '소통'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린다면 더할 나위없이 기쁘겠다"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6월 3일까지 계속된다./김선회기자 ks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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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동네 한의원들이 다들 어렵다고 난리다. 한의사들의 수는 10년만에 두배 가까이 증가한 반면, 물가 상승률 등을 고려할 때 한약 값은 10년전에 비해 거의 제자리를 걷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소비자들이 홈쇼핑과 인터넷으로 손쉽게 자신들의 입맛에 맛는 각종 건강보조식품과 의약 외품 등을 구입할 수 있게된 것도 한의계가 어려워지는데 한 몫을 했다.

 현재 한의사들은 어떤 자구책을 갖고 있는지 윤성찬 수원시한의사회 회장(수원 윤한의원 원장)을 통해 들어봤다. 그는 "우선 많은 한의사들의 노력으로 우수하고 안전한 한약재를 사용해 어린아이들은 물론 임산부가 임신 중에 복용해도 안전한 한약이 국내에 공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국민 홍보가 잘 안돼서 오해를 받는 것이 가장 안타깝다"고 했다.

"요즈음 병원에서 '한약 먹으면 간이 나빠진다'고 이야기하며 국민들에게 불안감을 주는 곳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약에 대한 불안감이 많은 일부 국민들이나 소비자 단체들은 그런 걱정을 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해열 진통제로 가장 많이 상용하는 타이레놀의 주성분인 '아세트아미노펜'이 약물이나 독소에 의해 유발되는 전격성 간염의 가장 많은 원인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국민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물론 한약재 중에서도 부자, 천오, 초오 등 맹독성 약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일반적인 질환에 그러한 약재를 처방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설사 극소수의 질환에 어쩔 수 없이 처방하는 경우에도 엄격한 수치와 법제를 통해 독성을 거의 없애고 처방합니다. 따라서 한약을 복용한다고 해서 간이 나빠질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의약관련 이익단체들의 노골적인 네거티브전략에 한의사협회가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이 국민들에게 불신을 받게 된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일부 이익단체들이 식품용 한약재의 안전성 문제를 침소봉대해 의약품용 한약재와 전체 한약의 안전성까지 의심받게 만든 것이지요. 간혹 언론에서 문제제기가 되었던 대부분의 한약재는 일반인들이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품용 한약재'이고, '의약품용 한약재'는 식약청의 엄격한 검사기준을 통과한 약재로 한의원에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한의원에서 처방하는 한약은 매우 안전합니다. 오히려 삼겹살, 상추, 과일, 쌀 등 우리가 매일 일상에서 섭취하는 식품들보다 유해물질의 잔류가 적습니다."

 윤 회장은 전체 한의계가 한꺼번에 변화하면 좋겠지만 우선은 본인이 책임지고 있는 수원시한의사회부터 변화하려고 노력중이라고 했다. "수원시한의사회는 '다가가는 한의사회'를 목표로 국민들께 한걸음 더 다가가서 한의약의 우수함을 알리고, 고통과 고충을 헤아리며 좀 더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그동안 수원시 관내 4개 보건소에서 2명의 한의사가 순환근무를 해왔던 것을 올해는 4개 보건소에서 각각 1명씩 한의사를 배치해 한의약 공공보건의료기능을 확대할 예정입니다. 또 화성행궁에서 5월부터 매주 일요일 오후에 가칭 '행궁에서 어의를 만나다'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화성행궁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우리나라의 우수한 전통의약인 한의약을 체험하게 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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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교육 30년만에 '세상을 끌어당기는 말, 영어의 주인이 되라'는 자기 계발서를 펴낸 민병철(사진) 건국대 교수(경인일보 2월 9일자 14면 보도)는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는 과욕을 버리고, 우선 구체적인 목표를 정하는게 좋다"고 말한다.

"자신의 업무 분야에 막힘없는 영어, 아니 막힘이 있더라도 의사 소통이 가능한 영어면 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직장인이라면 우선 자신의 업무에 필요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정리한 후에 영어로 옮기고, 영어로 말하는 걸 집중 훈련해야 합니다. 다음에 영어를 배우는 동료들과 동아리를 만들어 꾸준히 대화 연습을 하는 것이 좋아요."

민 교수가 말하는 영어 잘하는 비결은 간단하다. "우리는 모두 구구단을 다 압니다. 어떻게 아는 걸까요? 외워서, 계속 반복해서 쓰니까 잊질 않는 겁니다. 영어 공부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집니다. 영어회화의 기본 인프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단어, 문장의 기본량을 갖추고 있어야 말문이 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기본량을 습득할 때까지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서 중도에 포기해 버리기 때문에 영어 회화는 아무리 해도 안된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는 이와 관련해 적절한 예를 들었다. "이를테면 '이 학교의 역사가 얼마나 됐나요?'라고 영어를 묻을 때 'school'이나 'history'라는 단어는 생각나는데, 문장으로 만들려면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How old are you?'란 표현을 알고 있잖아요. 단어만 바꿔서 'How old is this school?'이라고 하면 되는 겁니다."

민 교수는 문법, 독해 위주 영어의 대안으로 '덩어리 영어, 동시 학습법'을 제시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화체 영어에 약한데, 사실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어요.

축구선수 박지성, 코미디언 김영철씨의 경우 영어 잘하지 않습니까? 대화체 영어는 사실 공부(study)하는 것이 아니라 연습(practice)하는 것입니다. 먼저 내 생활·업무에 필요한 내용을 질문·대답 형식의 '덩어리 영어'로 만듭니다. 이를 원어민 발음으로 녹음한 후 동시에 따라 하며 집중적으로 연습하는 것이 '자신만의 영어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에요. 이 인프라를 바탕으로 더듬대더라도 매너있게 이야기하면 누구나 외국인과 잘 소통할 수 있습니다." /김선회기자 ks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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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명의 남자 신데렐라가 탄생했다. 야식배달부 김승일(34).

지난해말 SBS 예능 프로그램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서 자신을 야식배달부라고 소개한 그는 오페라 투란도트의 주제곡인 '네순도르마(Nessun dorma)'를 열창했다. 그의 노래가 흐르자 방송국 세트에 나와 있던 MC와 출연자는 물론 시청자들 대다수가 감동에 북받쳐 눈물을 흘렸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성악과 교수는 "평생 이런 음색은 들어본 적이 없다"며 "앞으로 100일간의 레슨을 통해 이 청년을 새롭게 탄생시켜주겠노라"고 공언했다. 그후 그는 어떻게 됐을까.

4월 2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공개된 김승일씨의 모습은 180도 달라져 있었다. 터틀넥 티셔츠와 점퍼 대신 단정한 턱시도를 입고, 곱게 분장한 모습은 영락없는 성악가의 모습이었다. 40인조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춰 '오 솔레 미오(O Sole Mio)', '그라나다(Granada)', '사랑의 찬가'를 여유롭게 부르는 모습에 시청자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다소 불안했던 표정 대신 한층 여유로운 모습이었고, 노래할 때 아무 동작도 없었던 초기 모습과는 달리 음악의 리듬을 타며, 손짓과 몸짓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그에게 청중들은 열렬한 환호와 함께 박수를 보냈다. 김승일씨의 변화된 모습이 방송을 타기 직전 경인일보 취재팀은 용인의 한 연습실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수원에서 열릴 단독공연 준비를 하며 한창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어떤 공연을 준비하고 계시나요.

"오는 4월 24일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열릴 '내 생애 첫 번째 공연'을 위해 연습중입니다. '내 생애 첫 번째 공연'은 제목처럼 여러가지 여건 때문에 공연은 하고 싶으나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무대인데요. 방송에서 선보였던 '네순도르마'를 비롯해 가곡과 팝송 등 총 5곡 정도 부를 예정입니다. 그리고 제가 중심이 되긴 하지만 저를 도와 몇몇 분들이 무대에 함께 서서 공연을 해주실 거구요. 공연 수익금은 전액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쓰일 예정입니다."

-어떻게 공연이 성사된 건가요.

"배우 조재현씨가 경기도문화의전당 이사장을 맡고 계신데요. 우연히 TV에 출연한 저를 보시고,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드셨나봐요. 그래서 방송국을 찾아가 담당 PD를 만나셨고, 결국 저와 연결돼서 공연이 성사됐죠. 사실 제가 수원에서만 30년 넘게 살고 있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야식 배달하면서 경기도문화의전당을 많이 쳐다보곤 했거든요. '언젠가는 저 무대에 한 번 꼭 서보겠다'고 다짐했는데, 그게 현실로 이뤄져서 꿈만 같습니다."

-유년 시절과 학창시절이 궁금한데요, 어땠습니까.

"원래 고향은 전북 익산이구요. 목수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4살때 수원으로 이사와서 그때부터 죽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중동 건설붐이 한창일 때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니면서 저희 4남매(3남1녀)들을 키우셨구요. 어머니도 틈틈이 일을 하셨어요. 집안이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아주 어렵지는 않았어요. 저는 중학교때부터 노래에 조금 소질이 있어서 가요를 많이 불렀어요. 웬만한 노래 경연대회에서는 학급 대표로 나갈 정도였죠. 그런데 고등학교(삼일고)에 입학해 우연히 축제 오디션에 참가했는데, 거기서 어이없게도 예선 탈락을 한거예요. 태어나 처음으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죠. 하지만 그 이후에 선후배들과 함께 '모비딕'이라는 밴드를 결성해서 라디오 방송도 출연하고 그랬으니까 아무튼 그때 경험이 저에게는 약이 된 셈이죠."

-그럼 원래 꿈이 성악가가 되는 것은 아니었군요.

"기타를 치게 되고 여러 가요를 섭렵하면서 김종서씨를 알게 됐구요. 그 분 노래를 많이 따라 불렀어요. 그런데 저희 고등학교 합창반 선생님이 제가 노래하는 것을 지켜보시더니 성악을 한번 배워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하셨어요. 전 원래 졸업후 바로 취업하려고 실업고에 진학한 것인데, 그때 제 운명이 바뀐게 된거죠. 대학 입시를 앞둔 5~6개월 전쯤부터 성악과 교수님께 레슨을 받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처음에는 성악이 참 재미없더라구요. 그러다보니 레슨도 자주 빠지게 되고 성악을 포기할까도 여러 번 생각을 했죠. 하지만 주위에서 '잘한다 잘한다' 자꾸 하니까 조금씩 흥미가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이 길을 가야겠구나하고 생각했어요."

-방송에서 밝혔듯 어렵게 들어간 대학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는데요.

"대학생활은 고등학교랑은 좀 달랐던 것 같아요. 동기들은 대부분 예중·예고를 거쳤기 때문에 기본 발성, 호흡, 음정 등 기본기가 잘돼 있었거든요. 하지만 저는 레슨 기간이 짧다보니 처음부터 좀 차이가 있었죠. 게다가 음악하는 친구들은 거의 다 유복한 편이었어요. 그런 문화적 차이때문에 수업 끝나면 바로 사라지곤 했죠. 그러다보니 1학년때 성적은 별로 안좋았어요. 그러던 중 1학년 말에 어머니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셨어요. 그때 저는 학업을 중단하는 것이 낫겠다싶어 자원입대를 하게 됐습니다. 다행히도 군악대에 들어가 성악은 계속할 수 있게 됐죠. 제대 후에는 자진유급해서 2학년이 아닌 다시 1학년으로 복학해 정말 열심히 학교생활을 했어요. 필기는 물론 실기 모두 1등 할 정도로. 그런데 호전되셨던 어머니께서 다시 쓰러지셨죠. 그땐 가정형편이 썩 좋지 않아서 학업을 아예 그만 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학을 그만 두고 어떤 일을 했습니까.

"학교를 그만 두고 어떤 일을 할까 하다가 당시에 환율 차이가 10배 이상 나니까 무작정 일본에 가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는 사람도 없었는데 고등학교때 제2외국어로 일어를 한 것만 믿었죠. 막상 관광비자로 일본 도쿄에 가서 일자리 찾아봤는데, 취직이 결코 쉽지 않겠더라구요. 그래서 무작정 열흘간 돌아다니다 결국 일자리를 못찾고 귀국했죠. 그런 후에 서울 강북에 있는 한 주점에 웨이터로 들어갔어요. 그리고 그 곳에서 큰 충격을 받았죠. 사람들이 몇 십만원은 쉽게 쓰는 것을 본거예요. 그때 속으로 '아 돈이 이런 쪽으로 이렇게 도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제가 일한 첫날 수입이 25만원이었으니까 말 다한 셈이죠. 그 이후에 수원에 있는 나이트클럽에서 웨이터 보조를 했어요. 그리고 택배, 퀵서비스, 부동산 중개보조원, 통닭 배달 등 돈만 많이 준다면 닥치는대로 일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야식 배달과 인연을 맺었는데, 열심히 일하면 성과급도 있고, 일을 하다보니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맘도 편하고 해서 7년이나 일하게 됐습니다."



-TV 출연으로 유명인이 됐는데, 아직도 야식 배달을 하십니까.

"방송으로 얼굴이 많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배달 주문을 할때 '김승일을 보내라'고 자꾸 전화하셔서 사장님이 일을 좀 줄여 주셨어요. 요즘엔 새벽 5시에 나가서 배달이 좀 줄어드는 오후에 퇴근해요. 그리고 사실 방송 출연을 했다고 해서 생계가 나아지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원래 방송 나가기 전에 야식집 말고 다른 부업하려고 준비도 하고 있었거든요. 노점에서 옷도 팔까하고 생각했었구요. 그런데 얼굴이 알려지면서 그런 부업들을 포기해야 했어요. 지금은 음악공부에 좀더 치중하고 있는 중입니다."

-방송에 출연하게 된 계기가 야식집 사장님 때문이라고 하던데요.

"제가 어느 날 휴대전화기에 제 노래를 녹음해서 사장님께 들려줬어요. "아 이 분 참 잘하지 않아요? "라면서요. 그때 사장님이 "어 ! 굉장히 잘하네"하고 반응을 보이셨죠. 그래서 그 주인공이 저라고 하니까 장난삼아 '스타킹'에 연락하겠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런데 얼마후에 방송 작가들한테 실제로 연락이 왔어요. 그 계기로 TV에 나가게 됐구요. 방송 출연후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야식 배달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주위에서 그러더라구요. 네 상태(인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너만 모른다구요. 그제서야 '아! 방송의 파장이 크긴 크구나' 하고 느꼈죠." 

 -방송에서 레슨하기로 해 준 교수가 불명예스럽게 하차했는데,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된 겁니까.

"그 교수님께 레슨을 3번 정도 받았는데, 갑자기 그 분이 중도하차하게 되셨죠. 인터넷 게시판에는 '안되는 놈은 뭘 해도 안되는구나'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었죠. 그런 글에 상처도 받았지만 제작진들은 물론 저를 응원해주시는 많은 팬들이 걱정해 주셔서 제가 다시 무대에 설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얼마후 저의 사정을 알게 되신 성악가 배재철 선생님께서 새로운 멘토로 참여해 저를 도와주시게 됐어요. 사실 그 분도 갑상선 암에 걸려 노래를 못하실 만큼 어려움을 겪으셨는데, 그것을 극복하시고 현재 세계적인 테너로 꾸준한 활동을 하고 계시거든요. 그 분께 많은 것을 배웠고, 또 배울 예정입니다."

-결국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우연히 시작한 성악이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요.

"음악은 저에게 있어 꿈을 이뤄준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나이가 적은 편은 아니어서 아직은 두려움도 많습니다. 기회만 된다면 다른 아르바이트를 정리하고 음악으로만 승부를 걸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이 있었기에 제가 TV에 출연할 수도 있었고, 과분하게 큰 무대에 설 수 있게 됐습니다. 제가 음악인으로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선회 기자 ksh@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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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지진사태와 원전폭발, 리비아의 내전으로 나라 밖이 시끄러운 요즘. '아덴만의 여명작전'으로 영웅이 된 석해균(58) 선장은 우리의 관심에서 차츰 잊혀지고 있었다. 그런데 경인일보 취재팀은 그가 병원에서 생일을 맞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고, 부상에서 얼마나 회복이 됐는지, 향후의 계획은 어떤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22일 오전 취재팀은 케이크와 작은 선물을 준비해 석 선장이 입원해 있는 아주대 병원을 찾았다.

-건강이 많이 회복된 것 같다. 현재 본인이 느끼는 몸상태는 어떠한가.

"용변도 불편없이 볼 정도로 내부 장기는 거의 회복됐다. 다만 총상을 입은 왼손 손목과 다른 부위들은 좀더 지켜봐야 한다. 왼손손목이 다쳤을 때는 거의 절단된 것처럼 보였다. 끔찍했다. 그나마 수술이 잘 돼서 다행인데, 현재 손가락 2개는 감각이 살아났고, 나머지 3개는 아직까지 감각이 없다."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환갑이다. 병원에서 생일을 맞은 소감은.

"기자분들께서 찾아와 생일을 축하해 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동안 의사와 간호사들은 물론 영양사까지 꼼꼼하게 건강을 체크해줘서 무척 황송하고, 몸둘 바를 모르겠다. 평생 이렇게 병원에 오래 입원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분들께 누를 많이 끼친것 같다. 감사드린다."

 -최근 검찰수사에서 구출 당시의 상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랬다. 2월말까지는 전에 있었던 상황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도 대수술과 마취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기억력을 거의 회복했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구출 당시의 상황에 대해 설명해 달라.

"청해부대 최영함에서 경고 메시지를 보내자 해적들이 나를 끌고 배 밖으로 나갔다. 해적들은 나를 방패삼아 우리 군인들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총성이 들려 나는 순식간에 해적들이 잠자기 위해 깔아 놨던 매트리스를 뒤집어썼다. 그러던 중 배에 총을 맞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많이 아프지는 않았다. 상황이 너무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배에 총을 맞은 뒤, 얼마 안 있어 다리 쪽에 통증을 느꼈다. 그때도 아프다는 생각보다는 '아 총에 또 맞았구나'라는 느낌 정도였다. 하지만 제대로 걸을 수가 없어 기어다녀야 했다. 그 상황에서도 정신만은 잃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가 나에게 총을 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한 명이었는지, 여러 명이었는지. 그냥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총격이 오고가고 해적들은 서로 살겠다고 도망다니며 총을 난사했다. 그래서 추가로 총상을 입은 것 같다. 확실한 건 그때 당시 해적들의 주 타깃은 나였으니, 내가 총을 많이 맞은 게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사실 처음 맞은 총알은 무릎 윗부분이며, 우리 해군의 유탄으로 밝혀졌는데.

"그 당시는 칠흑 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게다가 상황은 무척 혼란했다. 설마 우리 군인이 일부러 나를 맞혔겠는가. 작전 상황상 불가피한 사격이었을 것이다. 누구를 원망할 필요도 없다. 다들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나와 똑같은 판단을 하리라고 본다."

 -그럼 사건 당시 어느 과정까지 기억이 나나.

"부상을 입고 기어다니다 군인들에 의해 구출받고 현지 병원에 옮겨질 때까지는 의식이 있었다. 속으로 '무조건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쓰러지면 안된다고 계속 되뇌었다. 병원에 도착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안심이 됐는지 그 때부터 의식을 잃었다."

-구출 전 해적들에게 구타를 당했다고 하던데.

"심하지는 않았지만 구타를 당하긴 했다. 처음에는 거의 안때렸는데, 내가 배의 속도를 늦추고, 계기판의 몇몇 부품을 고장내고, 배를 지그재그로 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해적들이 화가 나 구타하기 시작했다. 어떤 해적은 나에게 총을 겨누며 영어로 "Kiil you!"하며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래도 내가 눈하나 깜짝 안하자 배에 실렸던 화학약품 통을 폭파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나는 한국어로 "쏠테면 쏴봐라. 너도 죽고 나도 죽는거지"라고 응수했다. 결국 그 해적은 아무 것도 못하더라."

-정말 죽음이 두렵지 않았나.

"내가 평소 누구에게 지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그 당시는 더 오기가 발동했던 것 같다. 어차피 목숨은 하나니까 두렵지 않았다. 소말리아에 끌려가서 죽으나 배 위에서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내가 완강하게 저항하자 나를 방에 감금해놓고 외부와의 소통을 일절 차단시켰다."

-해적에게 납치됐을 당시 외부에 어떤 식으로 연락을 했나.

"납치당하자마자 회사와 청해부대에 납치사실을 이메일로 알렸다. 청해부대는 나에게 현장상황을 알려달라고 했고, 나는 해적들의 인원, 위치, 무기 등을 상세하게 알려줬다. 초기대응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때 이메일을 보내지 않았다면 구출은 쉽지 않았을 거라고 본다."

-청해부대에 의해 구출될 것을 확신했나.

"이메일을 보낸 후 청해부대에서 답신이 오기를 배의 진행을 최대한 지연시켜 달라고 했다. 그래서 기지를 발휘해 최대한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얼마 안 있어 레이더로 확인해 봤더니 3~4마일 뒤에서 우리 군함이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하지만 1차 구출 작전이 실패로 끝나고, 조금만 더 있으면 소말리아 해적본부로 들어가는 위기를 맞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구출되던 당일(1월 21일) 새벽 3시가 되자 당직 교대하는 해적들이 이제 귀환한다며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후 굉음과 총성 등이 들리기 시작하면서 구출될 수 있다는 확신을 했다."

- 이번 일 말고 혹시 전에도 해적들에게 당한 경험이 있나.

"예전 해적은 좀도둑 수준이었다. 지난 1999년 인도네시아에서 해적을 만난 적이 있다. 새벽 4시쯤 잠을 자고 있었는데, 누군가 칼을 들고 돈을 달라고 위협을 하더라. 마침 내 옆에 금고가 있었다. 당시엔 배에 오를때 습관적으로 1달러짜리 50매 정도를 묶어 몇뭉치씩 금고에 넣어놨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했던 것인데, 그 도둑은 100달러를 주었더니 내 손을 묶어 놓고 달아나더라. 줄도 느슨하게 묶어 놔서 쉽게 풀 수 있었다. 그래서 좀도둑은 두려운 게 없었다. 그런데 이번 일을 겪고 나니 생각이 좀 달라졌다. 설마 내가 당하겠나 하는 생각이 여지없이 깨진 것이다."

-해군에서 부사관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 이번 작전에 도움이 됐나.

"그때는 경제적으로 어려워 4년간 부사관 근무를 한 것인데, 실제로 이번 작전에 도움이 됐다고 보기는 어렵고 20년간 현장에서 배를 몬 게 실제 도움이 됐다고 보는 편이 맞다."

-왜 선장이 됐고, 그동안 어떤 배를 몰았나.

"주위에 배를 탔던 사람도 있었고, 군대에 있을 때 배탔던 사람들을 만나면서 제대 후 나도 배를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컸다고 생각한다. 집안이 워낙 가난해 내가 집안을 한번 일으켜 봐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1977년에 선원이 돼 본격적으로 배를 타기 시작했으며, 1995년 선장으로 진급해 2만t 짜리 유조선을 몰게 됐다. 이후 다양한 화물선들을 몰았다."

-본인은 남들이 꺼리는 특수 화물선을 주로 몰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이번에 피랍됐던 '삼호주얼리 호' 같은 경우 화학약품인 인(P), 솔벤트 등을 싣고 운반했었다. 이런 약품들이 들어 있는 화물선은 운항 심사 기준이 까다로운데, 일례로 탱크로리의 염분농도가 2PPM을 초과하면 안된다. 그래서 다른 선장들은 운항이 편한 일반 화물선이나 유조선 등을 선택한다. 사실 다른 화물선보다는 특수 화물선이 임금이 높아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일을 자주 하다보니 이제는 심사 조건도 무난하게 통과하게 됐고, 회사측에서도 내 경력을 높이 사 계속해서 이런 선박들을 운항하게 됐다."

 

-대통령까지 방문했을 정도로 국민들의 큰 관심을 받았다. 부담은 없는가.

"아주대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한 후 한참 지나서야 내가 언론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통령께서 방문해 '감사하다'는 말을 했을 때는 가슴이 찡하고 이상했다. 국민들의 관심이 사실 많이 부담된다. 내가 그 정도로 관심을 받을 만한 일을 했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배를 모는 선장이라면 누구나 배를 지키기 위해 나처럼 했을 거다. 죽기를 각오하고 해적들에게 덤볐으니까 살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퇴원후 다시 배를 탈 생각이 있나.

"물론 조건만 된다면 배를 다시 타고 싶다. 하지만 몸이 회복된다 해도 배를 탈 수 있는 신체조건이 되지 않을 것이다. 승선할 수 있는 신체조건은 무척 까다로운 편이다. 현재로선 다시 배를 탄다는 것은 100% 불가능하다고 본다. 앞으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그곳에서 일하고 싶다.   

-해적들의 처벌은 원하나.

"재판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법적으로 죄에 대한 대가는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끝으로 회복을 기다려준 국민들에게 한 말씀 한다면.

"그동안 많은 분들이 성원해주시고 걱정해주셔서 생각보다 몸이 빨리 회복된 것 같다. 이국종 교수님을 비롯해 저를 치료해주신 아주대 의료진들에게 정말 감사드린다. 이 은혜는 앞으로도 잊지못할 것 같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취재팀에게 그는 군인식으로 거수경례를 했다. 인사를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묻자 "단체생활을 많이 해서 그게 몸에 밴 것 같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억양은 영락 없는 경상도 사투리였다. 영웅이 없는 시대에 국민들에게 희망의 의지를 던져준 그는 분명 '캡틴'이었다.

[경인일보=대담:심영미 문화체육부 부국장·사진:임열수차장·정리:김선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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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싫었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와 악밖에 없었다. 시비 거는 사람이 있으면 죽을 힘을 다해 싸우기 일쑤였고, 자신보다 더 싸움을 잘하는 상대가 나타나면 그를 꺾기 위해 무술교본을 독파하고, 샌드백을 두드리며 몸을 단련시켰다. 그런 방황의 세월을 거치며 20대 초반 우연히 경북 청도의 동문사에서 기거하던 중 인생의 변환점을 만나게 된다. 농부들이 보릿대를 베어서 반듯하게 단으로 만든 다음 산비탈에 쌓아 놓은 것을 발견한 것이다. 농부들은 그것을 볏짚하고 섞어서 외양간에 깔아두기도 하고, 모자나 반짇고리, 베개문양 등을 만드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바로 '맥간(麥稈)공예'의 아이디어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맥간공예의 창시자 이상수


수원시 권선구 권선동에 위치한 맥간공예연구원에서 맥간공예의 창시자 이상수(53)씨를 만났다. 몇몇 회원들이 함께 모여 열심히 맥간공예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맥간(麥稈)'이란 보릿짚 줄기를 말하며 사람들은 흔히 '보릿대'라고도 부른다.

맥간공예 작품 만드는 것을 살펴보면 우선 작품의 바탕이 되는 밑그림을 그린 후 둥그렇고 길쭉한 보릿대를 평평하게 펴서, 도안 위에 모자이크 방식으로 붙인 뒤 목칠공예로 마무리하는 과정을 거친다. 맥간공예를 세상에 내놓은지 3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이씨에게는 성이 차지 않는다.

"맥간 작품을 보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작업 공정상 비슷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둘은 전혀 다른 공예입니다. 맥간공예 작품에서 뿜어내는 황금 빛은 보는 각도에 따라 광채와 분위기가 달라 입체감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그것이 맥간의 최대 장점이지요."

사실 그가 보릿대를 이용해서 작품을 하게 된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일지도 모른다.

예술에 소질은 있었지만 대학 진학은 엄두도 못냈고, 변변한 스케치북이나 물감 살 돈도 없었기에 자연물을 이용한 작품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골노인들이 사용하던 담뱃갑에서 금·은박지를 분리해 그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나뭇잎이나 나무줄기, 심지어 계곡물에 다듬어진 매끈한 돌에 그림을 그릴 수 없을까 연구하기도 했다. 그러다 마지막에 발견한 것이 바로 보릿대였던 것이다.

"우선은 생계를 위해 직장생활 닥치는 대로 했어요. 작품연구도 해야 하기에 낮에 할 수 있는 평범한 일은 엄두도 못냈죠. 주로 공장일이나 일용직으로 일했는데, 낮에는 맥간을 연구하고 밤에 주로 일했던 겁니다. 한 6개월쯤 돈이 모이면 그 돈 가지고 다시 집중적인 연구를 하고, 다시 돈이 떨어지면 다른 곳에 취직해 일하는 식이었죠."

# 첫 전시회를 열며 수원에 맥간의 뿌리를 내리다

이씨는 맥간 공예 기법연구에만 3년 넘는 시간을 투자했고 1983년 첫 실용신안을 따냈다. 이어 보릿대 잇기, 장식판 제조용 무늬지를 만드는 도안 등 맥간공예 기술에 관한 실용신안 특허 5개를 보유하게 됐다. 그리고 1986년 수원 남문에 있던 '선화랑'이라는 곳에서 역사적인 첫 전시회를 연다. 일반인들에게 맥간공예의 실체를 알리게 된 것이다.

"전시회를 준비하기까지 참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하루 3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어요.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작업을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반응이 참 좋더라구요. 우연히 삼성전자 관계자의 눈에 띄어 회사로 와서 강의를 좀 해줄 수 있느냐는 제안을 받기도 했어요. 처음엔 거절했는데, 계속 부탁이 들어와 1989년 삼성전자에서 동호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맥간공예를 전수하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맥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죠."


이제 제법 그의 문하생들이 늘어났지만 그의 고민은 여전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얄팍한 테크닉을 배워서 다른 곳에 응용하는 걸 목적으로 접근하거나, 여자회원들의 경우 결혼후 아예 손을 떼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제가 목숨걸고 맥간 공예 작업을 하는 반면 많은 이들이 순수 취미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물론 취미로 삼는 것을 탓할 수는 없겠지만 저의 모든 작품 노하우를 물려줄 수 있는 후배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게 저의 바람입니다."

이씨는 이제 국내를 넘어 해외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아이템도 맥간 뿐 아니라 금박을 이용한 '금박공예' 작품을 내 놓는 등 다각도로 고민하고 있다. "주위에 친한 사람들이 너는 일본에 가면 국보급 대우를 받을 수 있는데, 뭐하러 지하 골방에서 이렇게 썩고 있느냐고 해요. 하지만 저는 끝까지 작가 정신을 지키면서 순수 작품활동을 하고 싶어요. 우리나라의 공예제작 수준이 결코 일본에 뒤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앞으로 일본에 맥간과 금박제품을 수출해 한국의 공예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꼭 증명해보이겠습니다."  / 김선회기자 ks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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